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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vinlim17.d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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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있는 인간
진정 쓸모없는 인간이 되려면

Essay
AI
  2025.04.10

인간이 쓸모를 지니고 태어나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손을 뻗지 않을 기회라도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과연 어떤 쓸모를 가지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까?”라는 고민 정도는 해봤을 법 하지만, 이 질문을 ‘어떠한 생명체든 세상에 도래할 때에 특정한 당위를 지녀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겁니다. 태어나기 전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소울(Soul, 2020)>를 봅니다. 굳이 각자의 삶이 어떤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냐를 따져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토대는 사회에서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구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이 됩니다. 우리 모두는 정당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 그저 모든 생물의 가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지금 이 순간을 향유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각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 사명을 꿋꿋이 지켜나가는 사람을 우리는 쓸모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인용하면) “이곳이 내 땅이다”라는 말이 처음 주창된 이후로, 사람들은 서로의 쓸모에 다른 사람을 가두는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그 커다란 지면 위에 내가 뉘일 곳 하나쯤은 있어야 했기에, 우리는 모두 지주(地主)의 쓸모가 되어 살아갔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그 불평등에 분노하면서도, 누군가의 지주(支柱)가 되고 싶었기에 서로를 “필요”라는 질긴 끈에 옭아매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인간과는 다르게 쓸모로만 가득 찬 존재가 나타났으니, 우리는 이를 실체가 있는 세계에서는 로봇, 실체가 없는 세계에서는 인공지능이라 부릅니다. 처음에는 인간을 ‘쓸모’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줄 구원자로 여겨졌지만, 섬뜩하게도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의 쓸모는 무엇입니까?”

이제껏 다수 인간의 쓸모

무리지어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쓸모는, 자신의 노동을 집약해 만들어낸 산출물을 교환하며 서로의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에 와서 달라진 요소라고는,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위층의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위해 자신의 목을 힘껏 빼낼 필요가 없다는 점 뿐입니다. 조금은 예외적인 경우로, 힘겹게 일하는 와중에 틈틈이 이야기를 만들고, 부르며, 써낸 사람들 - 통틀어 예술가들 - 이 있었고, 그들도 공동체의 통합과 영속에 기여했기에, 넓게 바라보면 위의 조건을 충족하고도 남을 존재들이었지요. (사실 이외에도 오로지 지주의 쾌락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인간이 산출할 수 있는 가치의 범위를 넓히면 보편적인 쓸모의 정의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이 문단의 첫 문장을 충실하게 따르면,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누구에게나 쓸모가 없습니다.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지배자이든, 바로 옆에 있는 가족이든 간에 말입니다. 지금은 - 소파 방정환 선생님 덕분에 - 우리가 ‘어린이’라고 존중하는 이들조차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매일 매시 매초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던 때로부터 지금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한 존재가 다른 이들의 생존에 기여하는지에 대한 평가가 지금보다 훨씬 엄격했던, 1945년 이전의 세계는, 인간이 아닌 자연조차 거대한 기계의 일부로 여겼을 만큼 암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근대적 사상의 기초가 되는 수많은 저작 중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 1626)의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을 보면, 인간이 자연 뿐만 아니라 공동체 울타리 밖에 있는 수많은 존재들을 어떻게 취급했을지 가늠이 됩니다. 지식을 인간의 물리적 힘과 동치시키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인간이 겨우 뭉뚱그려낸 규칙 아래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이 문자들에서는 굳이 깊게 파고들 필요도 없이 잡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지 모를) 야만의 시대에서는, 그 누구도 쓸모의 틈바구니를 벗어나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Knowledge and human power are synonymous, since the ignorance of the cause frustrates the effect;
for nature is only subdued by submission,
and that which in contemplative philosophy corresponds with the cause in practical science becomes the rule.
지식은 곧 인간의 힘이다. 원인을 모르면 결과를 (예측하는 데)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오직 복종에 의해서만 정복되며,
(복종에 의한) 끊임없는 관찰에서 원인에 해당하는 것이 실제의 탐구에서는 법칙이 된다.
Novum Organum, by Lord Bacon, ed. by Joseph Devey, M.A 중 일부를 인용

다양성과 보편 인권의 쓸모: 전체주의 정상성과 진화론

이 와중에 멘델(Gregor Mendel, 1822-1884)과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나타납니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너희들도 다른 생물종과 다를 게 없다”며 꾸짖은 최초의 두 인간입니다. 폭력적인 자연관에 처음으로 경종을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직 “쨍”하는 소리를 들을 준비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잠시 자취를 감추었던 악습이 고개를 듭니다. ‘자연선택’이라는, 그 자체로는 이 세상 어떤 생물체에게도 해가 없는 논리를 가져다가,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개량해야 한다는 황당한 이론에 힘을 보탭니다. 다윈의 이론 자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유전적 변이가 특정 환경에서 생존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생존에 유리한 특성은 자손으로 전달되며, 자손의 과잉 생산으로 벌어진 생태계의 대결투가 마무리되고 끝끝내 살아남는 개체가 “자연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하지만 우생학을 신봉했던 자들은 변이 - 유전 - 과잉생산 - 적자생존으로 이어지는 (한낱 인간은 감히 가늠하기조차 불가능한) 억겁의 시간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레토릭만을 가져다가 학살의 당위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자연조차 우연에 맡기는 생물의 변이를 감히 인간의 손으로 재단하려 애쓰다가, 역사에 수많은 상흔을 남기고 자멸했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사회의 기본 원리를 구축할 때, 단일의 정상성을 그 기반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상식이 되었지만, 특정한 종이 번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어떤 환경이 닥쳐도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다양성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상위”의 손길이 먹이 피라미드 아래로 단일화의 마수를 뻗히면, 시간이 지나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지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나치 치하의 독일입니다. 우등한 인종만이 지구 위에서 번영해야 한다며 그들이 자행한 “다양성” 청소는, 전쟁이 지속되지 않으면 - 또는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지 못하게 된다면 -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어려운 군국주의 국가의 특성과 맞물려, 처절한 망국으로 끝을 맺었지요. 이 시대의 독일에 앞서 세워졌던 수많은 제국들 - 알렉산드로스, 로마, 무굴, 잉카, 아즈텍, 나폴레옹의 프랑스, 몽골, 진과 한으로부터 비롯한 수많은 천자의 나라들까지 - 모두 종교를 포함한 문화적 다양성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실종되어가던 시기 종말을 맞이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자유의지의 쓸모: 의무로부터 나아가는 삶

드디어 피로 얼룩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끝났습니다. 살육에 대한 반성으로 유엔이 창설되었고 세계인권선언(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이 쓰여집니다. 1, 2, 3세계를 가리지 않고 모든 나라의 최고법(헌법)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두꺼운 글씨로 담기기 시작합니다. 붉은 참상이 하늘을 뒤덮어, 이 현실이 너무나 원망스러워, 이 세상 모든 일을 관장한다는 절대자를 찾지 않을 법도 한데, 사람 보편의 권리도 하늘이 주었다며 다시금 목을 들어 우러러 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꼭꼭 씹어 들려줄 타인이 없는 관계로, 인간은 여전히 절대자에 목말라 했던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쓸모는 너가 비롯되었음이라” 당신이 태어난 일 자체만으로 그 쓸모를 다 했으니,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맘껏 뛰어놀아도 좋다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규범으로는 “쓸모가 없어도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명시되었으나, 이와 동시에 납세의 의무와 국방의 의무가 발생합니다. 재화를 벌어야 합니다. 총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저절로 쓸모가 생겨버렸습니다. 사회의 어린 구성원 모두는 획일적인 교육을 받고, 어른이 되서는 공동체 발전의 역군이 되려 열심히 일하고, 근미래에 내 자리를 대체할 자손을 낳고, 공공의 기준만큼 늙게 되면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저절로 쓸모가 생겨버렸습니다. 지도자를 내 손으로 뽑을 수 있고, 예전보다는 풍요롭게 삶을 가꿔나가는 듯하고, 피의 위협으로부터 겨우 벗어나게 되었는데,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최소한 내 쓸모를 내가 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아직 시기상조입니다. 납세자의 쓸모, 가족의 쓸모를 다하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조차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회의 쓸모, 유전자의 쓸모를 다하려면 내가 하고 싶은 사랑을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나의 겉모습 때문에, 겨우 헛된 규칙의 쓸모를 다하기 위해, 내가 머물고 싶은 곳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 반작용으로, 두 번째 종전으로부터 4반세기가 막 지나려던 찰나에, “쓸모없을 권리”를 주창하며 청년들이 거리로 나섭니다. 그것이 1968년의 혁명입니다. 현대 자유주의의 태동이라 일컬을 수 있는 사건이지요. 의무의 부여와 수행이라는 단순한 쳇바퀴에서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인간은 비로소 처음 가지게 되었습니다.우리의 쓸모는 노동과 그 산출물에 있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 이에 대한 반동에는 항상 연대하여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사실, 함께 손을 부여잡는 것이야말로 서로에게 유일한 쓸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점차 보편화됩니다. 그렇게 50여 년이 흘러온 와중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커다란 산봉우리를 봅니다. 앞에는 100% 쓸모로 무장한 존재들이 놓여 있습니다.

모두의 쓸모가 없어졌을 때

육체 노동, 지적 노동의 영역을 통틀어 AI는 인간의 자리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에 도래한 이래로, 우리 종의 쓸모가 현대와 같이 급속도로 위축된 사례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서로의 쓸모를 마음대로 재단하기는 했어도, 쓸모를 억지로 부여하기는 했어도, 목숨을 남겨둔 상태에서 사람의 쓸모만을 제거하는 건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그렇게 작금의 시기를, 노동이 총체적 위기에 처한 시대라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의 시각도 존재합니다. 무너져가는 노동에 대한 공포를 산업혁명 초기의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기계 파괴 운동) 만큼 근거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라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술은 인간의 쓸모를 지속해서 변화시켜 왔기에, - 미학 분야에서는 ‘과도기적’이라는 단어를 붙여 수식하는 - “현재”도 그저 인간이 AI에 적응하는 과정 속에 있다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낙관적인 또는 비관적인 이 사고의 궤적들은 결국 사람이 “쓸모”있는 존재여야 함을 가정합니다. 미래가 밝다고 이야기하는 길은, 한 사람의 쓸모는 그저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어둠을 상정하는 미래는, 쓸모가 사라져 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사람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두 서사 모두 나름대로의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노동과 가치 생산에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두 입장 사이에서 휘몰아치는 의식의 혼란을 갈무리하기 위해서는 본질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보편의 인권입니다.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일러주었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생각한다면 그의 쓸모를 - 최소한 - 엄격하게는 재단하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 중 그 누구도 스스로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당히 마주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우연히 주어진 삶을 지탱할 뿐이지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목적을 따질 수 없듯이, 사회를 이루는 한 명 한 명에게도 그러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방향이라는 숲보다, 한 그루의 나무가 가진 독창성에 주목할 차례입니다. 그렇게 마침내 인공지능이 우리의 쓸모를 묻게 될 때에는, 우리 인간은 - 위에서 언급한 연대의 쓸모를 제외하고 - 서로에게, 그리고 자연에게 더 이상 쓸모를 묻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거의 모든 노동이 우리의 손을 떠나게 될 미래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